한국 EV, 역주행 이제 STOP
2008년 12월호 지면기사  / 글│원 춘 건 대표<cgwon5@korea.com> 그린카 클린시티 컨소시엄(GCCC)

공해가 초래한 지구온난화, 나날이 치솟는 유가, 이를 감당 못해 허덕거리는 국가경제…. 이 같은 난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으로 낙점받은 차가 바로 전기자동차(Electric Vehicle, EV)다. 미국, 일본과 같은 자동차 종주국이나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유럽은 물론 중국, 인도 등 후발주자에 이르기까지 EV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영국의 브라운 수상은 ‘전기자동차 이니시어티브’를 선언했고, 이에 질세라 태양광발전 등 대체 에너지 분야에 일가견 있는 스페인은 6년 내에 EV 100만 대를 도입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프랑스는 EV 충전망 사업을 하는 벤처기업인 프로젝트베터플레이스(Project Better Place)의 사업 파트너인 르노-닛산을 앞세워 포르투갈에 EV를 도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덴마크와 이스라엘 역시 프로젝트베터플레이스와 함께 EV 사업을 공동 추진키로 합의했다. 이태리, 스위스 같은 기술 강소국들도 EV 시장 선점을 위해 서두르고 있다.


교두보 확보전

미국에서는 구글과 같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30여 개에 달하는 전기자동차 회사에 투자하거나 혹은 직접 회사를 설립하여 디트로이트의 내연기관차들을 대체할 차세대 자동차 개발 생산에 앞장서고 있다. 또 차세대 자동차는 수소연료전지차라며 EV를 백안시 해왔던 빅3(GM, 포드, 크라이슬러)도 2008년 9월을 기점으로 한결같이 수소연료전지차는 “자식들 세대에나 상용 가능한 차”라며 EV로의 방향 전환을 선언했다.
인텔의 전 회장 앤디 그로브(Andy Grove)는 “내 생전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사업을 본 적 없다. EV 시장은 이미 급격한 변화로 내달릴 변곡점에 도달했다”며 새 시장에 ‘올인’한다고 선언했다. PayPal이란 회사를 차려 그 동안 벌어온 돈을 전기 스포츠카 제조사인 테슬라에 몽땅 투자한 엔론 머스크 회장이나 구글의 세르게이 브린 회장 등의 영보이들은 물론, 앤디 그로브와 같은 올드보이들 모두 EV 시장에 뛰어들면서 교두보 확보를 위한 D-DAY를 준비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전기 스포츠카를 상용화하며 유명세를 탄 테슬라는 10만 달러나 되는 스포츠카 시판에 이어 6만 달러짜리 5인승 세단형 EV 생산 공장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편,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행여 이 공장이 다른 주에 세워질 것을 우려해 주정부가 앞장서서 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테슬라에 무상 제공하는 동시에, 그 생산설비에 소요되는 시설물 구입에 대해서도 면세 조치를 취하는 등의 정책적 지원으로 EV 시장에서의 주도권 확보에 나서고 있다(사진 1). 
포드에 인수되었다가 다시 노르웨이 기업 품으로 돌아간 EV 전문 제조업체인 Think는 2009년 미국시장 론칭을 목표로 2인승 Think와 4인승 Think city 양산체제를 구축하고 있으며, NEV 전문 제조업체인 ZAP은 중국에서의 수입선을 대체하기 위해 현재 켄터키 주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켄터키 주는 NEV가 운행할 수 있는 도로 속도제한을 45마일까지 상향 조정하는 법 개정까지 단행했다. EV 생산공장을 유치해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주정부와 안정적인 생산기지 확보로 EV 시장을 리드하려는 기업 목표가 맞아떨어진 경우다.


한국형 EV 개발

오래 전부터 EV를 개발해 온 일본은 하이브리드 카(HEV)의 선전을 바탕으로 향후 전개될 EV 시장 쟁탈전에서도 선두자리를 굳히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우선 2009년부터 세계 최초로 양산, 상용화될 미쓰비시 i MiEV를 세계 각국으로 진출시켜 시장을 미리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사진 2). 미쓰비시는 이미 미국을 비롯해 아일랜드, 뉴질랜드 등에서 시험주행에 들어갔으며 중국, 러시아와 같은 신흥시장들을 집중 공략해 가고 있다. 이처럼 2010년에 출시하려던 계획을 무려 1년이나 앞당긴 데에는 신시장에서의 선점을 위함이다.
이에 질세라, 프로젝트베터플레이스와 손잡은 것만으로 EV 시장에서 어느 정도 이니시어티브를 확보한 것으로 판단되던 닛산자동차는 향후 EV만을 생산하겠다고 만천하에 공포함으로써 주도권 굳히기에 들어갔다. 크라이슬러와 포드까지 EV 생산을 선언하면서 세계 자동차 업계는 EV를 둘러싸고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고 있다.
국내에서는 EV와 관련, 2008년 6월 국내 일류 기업들이 힘을 모아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한국형 전기자동차 충전망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목표로 탄생한 그린카 클린시티 컨소시엄(GCCC)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GCCC는 지난해 10월 한 번 충전에 최고 160 km 밖에 달릴 수 없는 EV의 한계를 배터리 충전소와 교환소를 설치하는 충전망으로 극복한다는 프로젝트베터플레이스의 사업계획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출범했다. 한국은 미국의 두 배에 달하는 유가에 고통받는 상황, 도시 밀집형 주거형태, 좁은 국토면적 등 충전망 설치에 용이한 여건과 전국이 하나의 전력, IT 통신망으로 연결되어 있어 관리 통제가 손쉬운 인프라를 갖춰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
GCCC는 전세계가 초고유가에 몸살을 앓던 시기에 출범한 까닭인지 정유 업계나 자동차 메이커들의 큰 견제없이 순항하고 있다. 컨소시엄이 처음 국회에서 세미나를 열 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EV 관련 법적 근거조차 없다는 이유로 EV가 차 취급도 받지 못했지만,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국토해양부가 전기자동차 시범사업을 실시키 위해 전기자동차 간담회를 개최했고, 같은 시기 방송, 신문을 비롯한 모든 매스컴들도 EV 관련 뉴스를 쏟아내면서 큰 이슈가 됐다. 컨소시엄 대표를 맡은 필자 역시 곳곳에서 들어오는 취재요청을 교통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한 방송사의 취재요청을 접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에너지 관련 특집방송을 기획하고 있다며 유명 연예인이 실제로 EV를 운행하는 과정을 생중계하려 하니 EV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업계로서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좋은 홍보기회였지만 눈물을 머금고 요청을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저속형 전기차(NEV)가 시중에 나와 있지만 안전 관련 법적 규제로 인해 일반도로를 주행할 수 없는데다가, 일반도로를 달릴 수 있는 EV는 아직 만들어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컨소시엄의 제 1차 목표는 EV 충전망 구축이 아닌 한국형 EV 개발로 수정됐다(그림 1). 시장이 원하는 것을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 기업 생존의 기본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이마저 충족시킬 수 없다는 현실의 벽에 전략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마침 심재철 의원의 도움으로 결성된 전기자동차 활성화 태스크포스 팀 회의를 통해 참여사들의 중지를 모은 결과,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형 전기자동차 개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일반도로는 물론 고속도로까지 넘나들 수 있는 고성능 EV를 개발한다는 목표가 설정됐다. NEV가 일반도로를 달리려면 경차 수준의 안전기준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 국토해양부의 방침인지라 애초부터 범용 EV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는 한국형 EV 시스템을 개발해서 세계시장을 공략한다는 컨소시엄의 장기 목표에 부합하는 자동차를 만드는 것으로 당연히 고속도로 주행이 가능해야 했다.


빗나간 그린카 정책

회의 결과에 따라 한국형 EV의 스펙을 책정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우선, 세계 각국의 EV에 대한 성능 및 제원 조사와 검토에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가 벤치마킹 할 대상 차종을 선택했다. 대우자동차의 마티즈와 비슷한 크기에 한 번 충전으로 160 km를 주행하며 배터리 무게는 180 kg 정도인 미쓰비시 i MiEV가 벤치마킹 대상이 됐고, 이 차에 준하는 성능의 한국형 EV 스펙을 참여사들과 공유했다. 이렇게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형 전기자동차 개발 신호탄이 쏘아졌다.
2008년 8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은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다가오는 60년을 위한 미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그 미래 비전의 5대 핵심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저탄소 녹색성장’이며 녹색성장의 핵심에는 ‘세계 4대 그린카 강국 진입’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 녹색선언에 EV 개발을 추진해 온 컨소시엄 회원사들은 당혹해 했다. 전세계가 저탄소 정책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저탄소 시대보다 다가오는 수소시대를 대비하겠다고 한 선언에서 현재와 미래의 괴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세계의 거의 모든 자동차 회사들이 수소연료전지차는 다음 세대에나 가능한 기술이라며 한결같이 유보하거나 전기자동차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는 때에 우리만 수소연료전지차에 목을 매겠다는 것이다.
세계시장 대세는 이미 EV 쪽으로 기울었다. 수소연료전지차는 고가의 백금촉매 사용, 고난도 수소처리 기술 등 차량 가격을 대중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만 할 숙제들이 산재해 있고 풀리지 않고 있다. 만일 현재 시장요구와 동향을 무시한 채 우리만이 수소연료전지차 개발에 성공했다고 한들 수소연료전지차의 충전 인프라조차 준비 안된 나라에 어떻게 차를 팔 것이며 제조한 차를 수출할 시장조차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세계 4대 그린카 강국을 달성할 것인가!
정부는 여느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에너지 안보 확립을 위한 脫석유화 정책을 수립, 발표했다. 태양열, 풍력, 지열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을 키우고 10기가 넘는 원자력발전소를 다수 건설해 석유의존도를 낮춘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렇게 대체에너지 산업을 통해 생산된 전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들과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각국이 EV를 서둘러 도입하고자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신재생에너지 산업이나 원자력 등 전기 생산을 전제로 하는 산업을 바탕으로 할 경우, EV가 이들 산업과 맞물려 운영될 때 친환경, 저비용, 고효율이라는 시너지 효과를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화력발전은 석유를 사용하기 때문에 공해 물질을 배출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전력 수요에 탄력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전력 수요 증감에 따라 스위치를 끄고 켜는 것만으로 발전량을 손쉽게 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양열이나 풍력, 지열발전 등은 자연조건에 따른 변수가 많아 발전된 전기를 일단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축전 시스템과 연계돼 있지 않다면 효율적 사용이 불가능하다. 이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규모 축전 시설이 필요한 데, 전기자동차는 바로 이같은 축전 시설의 대체 역할을 할 수 있다. 심야에 생산된 싼 값의 잉여 전력을 배터리에 충전시켜 사용하다가 차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전력망에다 역으로 비싼 값에 전기를 되팔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그림 2).
정부 계획대로라면 향후 우리나라 전력 생산에서 원자력 비중은 현재의 40%에서 59%로 증가하게 될 것인데, 에너지경제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이 같은 원전 비중은 기저부하, 즉 일정한 시간에 계속적으로 걸리는 부하를 감당하는 역할을 하는 최소 수준으로 전혀 과다하지 않은 수준이라고 한다. 원자력발전은 피크타임 등의 전력 수요에 관계없이 무조건 24시간 풀가동을 해야 한다는 특성이 있다. 원전 비중이 40%대인 현재도 한밤의 남아도는 전력 문제로 심야전기가 주택용의 거의 1/3 수준의 가격으로 공급되고 있다. 수요에 대한 탄력성이 떨어지는 원자력이 전력 생산의 기반이 된다면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EV 도입은 필연적이다.
EV가 환경보호나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훌륭한 대안임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해서 세계 4대 그린카 강국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EV 선택은 필수적이다. 나아가 정부가 추진하는 에너지 정책면에서 보더라도 EV는 선택사항이 결코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어떤 전기자동차를 누가, 어떻게 만들어 세계 자동차 시장의 리더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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