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형 자동차로는 아시아 자동차 회사들이 주력으로 생산하는 풀 하이브리드(Full Hybrid, 그림 1), 미국과 아시아 자동차 회사에서 개발중인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HEV: Plug-In Hybrid, 그림 2, 3, 4), BMW 등 일부 유럽 자동차 회사에서 개발 생산중인 마일드 하이브리드(Mild Hybrid) 같은 하이브리드형 전기자동차(EV: Electric Vehicle), 그리고 하이브리드형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Multiflex 계열 등)를 손꼽을 수 있다. 이러한 자동차들은 미래형 자동차 분야에서 현재 중요한 역할과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시장에 안착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어떤 방향의 평가나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 ‘루카스 함정(The Lucas Critique)’주 1)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제품화하고 산업화까지 가는 데는 이공계 출신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0여 년 전,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하에 있었을 때 필자의 지인(知人)이 한 말이 기억난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이전에 창업투자회사들은 기술개발 회사에 투자하기 위해 투자심사역에 이공계 출신들을 대거 뽑았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후, 아이러니하게도 해고된 상당수의 심사역이 이공계 출신이었다. 갑자기 이 얘기가 주제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의문을 가질 독자가 있을 것이다. 결국 주제와 관련지어질 것이란 점만 미리 밝혀둔다.
그 당시 정리해고가 한창일 때, 심사역으로서 살아남은 경제ㆍ경영을 전공한 필자의 지인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평균적으로 이공계 출신들은 좁은 시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면서 “해고당한 이공계 출신의 심사역 중에는 자기가 회사에 기여한 바가 큰 데 자기를 자를 수 있냐! A, B, C 사가 가짜에 가까운 기술을 갖고 투자 유치를 받아 회수할 수 없는 손실이 될 뻔한 것을 자신이 막지 않았냐! 다른 창투사들은 지금은 괜찮지만 조만간 들통 나서 크게 손해 볼 것이라는 등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정리해고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창투사에서 필요한 사람은 손해를 막는 사람이 아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자금, 그리고 향후 유치할 자금을 최대한 회전시켜 각 상황에서 최대한의 수익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전망을 보고 투자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의 투자를 받는 회사도 여러 단계가 있다. 최초의 종자돈이 필요한 경우, 양산 라인을 깔 돈이 부족한 경우 등등. 각 케이스에 따라 다른 방식의 투자와 회수가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투자 후 수익이 난 상태에서 회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조금은 가감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대개 이와 같은 대화를 나눴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대목은 필자가 미래형 자동차와 에너지 그리드와의 상관성을 밝히는데 씨앗 역할을 했기에 소개한 것이다. 각자의 능력이 아무리 훌륭해도 롤 모델이라는 측면을 무시해서는 성공적인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다는 상식을 다시 한번 곱씹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각 기술과 제품간 마리아주(marriage)의 중요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만큼 미래형 자동차와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는 멋진 마리아주가 필요한 분야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한 기술적인 측면의 고찰을 미래형 자동차의 핵심 부품인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를 시작으로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에서의 마리아주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의 핵심 부품은 크게 4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양극, 음극, 전해질, 그리고 전해질을 품고 있는 분리막이 그것이다. 대개 부품 수준의 연구자들은 개발을 함에 있어서 다른 부품과의 마리아주에 치명적인 맹점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기술연구나 개발은 하나만을 바라보고 하나를 얻어내려는 경향이 강하지만, 제품은 모든 측면을 고려하고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리튬이온이나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 연구자들이 기술과 함께 세계 최초, 세계 최고의 타이틀을 달고 언론홍보까지 되는 장면을 종종 접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기술들이 각 회사에서 부품간 마리아주를 맞추기 위해 진행하는 디자인 리뷰(design review) 단계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9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실 세계 최초, 세계 최고라고 홍보된 요소기술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치는 것도 다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탄소 나노튜브를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음극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관련 논문이 수없이 많이 발표되었다. 하지만 필자는 2007년경 해외 저널인 [Electrochemistry Communications]에 낸 논문에서 튜브형 탄소 나노튜브는 리튬 이차전지형 음극재로 쓰기 어렵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단순히 소재 특성만을 평가한다면 좋은 듯하지만, 실제 셀을 구성했을 때를 감안하면 부피 당 에너지 밀도가 나오지 않고 저온에서 만들어진 소재답게 초기 효율 잡기가 쉽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각의 소재를 개발하는 입장에서는 필자의 말이 아쉬울 수 있지만, 실제 셀을 연구하고 제품을 만드는 업체의 입장에서는 학연에서의 개발 내용에 아쉬움이 많다는 점을 늘 토로했다.
어떤 전극 개발 논문을 보면, 짝을 지을 수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뭐랄까, 동성간의 결합을 주장한다고나 할까. 인간사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에서는 labile(호스트 구조에서 제거되거나 다시 채워질 수 있는)한 리튬이온이 양쪽에 다 없으면 전지가 구성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성능을 가졌더라도 그 짝이 존재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 이치인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아주 우수한 성능을 가졌지만 현재 기술로는 그 전위대에서 견디는 전해질이 존재하지 않아서 아쉬웠던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모 대기업에서 몇 년간 야심차게 밀어 붙였던 리튬 이차전지 형태는 고체 고분자 전해질의 경우는 가능할지 몰라도 전극 활물질이 액체 전해질에서 녹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다. 또 다른 예로, 고체 고분자 전해질은 상온과 제법 높은 온도에서는 쓸 만한 전도도를 가졌지만 실제 리튬 이차전지를 사용하는 환경은 영하 수십 도에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쓸 수 없기도 했다. 주 2) 그 중 가장 안타까운 예는 리튬금속 이차전지다. 설령 고분자 전해질을 썼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학연이나 기업에서 시도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많은 이유와 원인을 대지만, 필자는 화학적인 원인보다 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쓸 수 없다고 못박고 2004년부터 차세대전지성장동력사업단 기획총괄을 맡고 있던 시절 리튬금속고분자 이차전지를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이유는 이랬다. “전극간에 일정 압력으로 누르고 있는 현재의 전지 시스템에서, 방전시 녹아나간 리튬(Li+로 산화되면 전해질에 녹아나간다)이 재충전시 다시 그 자리로 석출(Li 금속으로 환원되면 고체로 떨어진다)되지 않고 비어 있는 쪽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냥 전해질에 담궈 1~5% 산화/환원을 볼 때는 고려되기 어려운 것이다. FOM(Figure of Merit) 등의 수많은 팩터를 만들어 연구했지만, 소재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돼야 할 것은 그 소재를 채용하는 전지의 구성으로서의 마리아주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자동차산업에서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의 마리아주
원래 최초의 상업화 풀 하이브리드에는 PEVE(Panasonic EV Energy, 마쓰시타전지공업과 토요타자동차의 합작 벤처)에서 만든 Ni-MH 이차전지가 장착돼 있었다. 그 당시 토요타자동차가 파트너로 선정한 마쓰시타전지공업은 리튬이온 이차전지 시장에서 일본 내 이미지가 만년 3위 기업으로 고착화돼 있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소니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회사였다. 만약 산요전기, 소니(당시 소니에너지텍), 마쓰시타전지공업 중 한 회사를 고르라고 한다면, 현명한 자동차 회사 사주라면 당연히 산요전기와 마쓰시타전지공업 중 골랐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상용화돼 있던 리튬이온 이차전지는 LiCoO2 양극과 흑연계 탄소재 기반의 것으로 전지의 안전성이나 신뢰성을 감안했을 때 아직 부족한 감이 있던 시절이었다.
다른 산업과 달리 자동차산업은 출시된 자동차 한 종류가 중요한 결함으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면, 그 자동차 회사의 존폐를 좌우할 정도로 치명적일 수 있다. 하물며 도로를 운행중인 자동차의 하이브리드 카용 이차전지 시스템이 발화 혹은 폭발이라도 한다면 더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최초로 프리어스가 개발될 시점에서는 전통의 전지업체라고 할 수 있는 마쓰시타전지공업과 산요전기가 기술 축적을 하고 있었던 Ni-MH 이차전지가 주요한 후보가 될 수 있었다.주 3) 그러나 Ni-MH 이차전지와 풀 하이브리드의 밀월은 20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미래형 자동차에 맞춰 개발된 중대형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 1세대형이주 4) 풀 하이브리드와 새로운 마리아주를 노리게 되었다. 새로 등장한 중대형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는 어찌 보면 소형 리튬이온 이차전지의 초기 셀 구성과 흡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양극으로는 망간계 화합물로서 보다 업그레이드된 형태를 쓰고 음극은 흑연계, 하드카본 혹은 코크스 계열들을 사용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 중반에 리튬이온 및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의 전극 소재에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치료제로 사용된 양, 전극 활물질의 ‘칵테일’이 대세를 이루게 된다. 또한 이 칵테일된 전극 조성 등은 각사의 고유한 기술이고, 심지어 모델에 따라 최적화된 값들이 다르게 나타났다.
이런 식으로 신물질 혹은 예전 물질 간의 칵테일화 등을 통해서 리튬 이차전지는 응용분야 별로 특화된 형태가 만들어지면서 Ni-MH 이차전지에 빼앗겼던 ‘헌 신랑’인 풀 하이브리드를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한다. 물론 이 때 풀 하이브리드의 새로운 미래로 제시됐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Plug in Hybrid)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시장 진입을 가속시킨 데는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망해가는 Old GM에 볼트(Volt)의 역할이 컸다. 얼마 있으면 파산보호 신청을 거쳐 거듭날 New GM의 구원투수로 제시된 볼트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라고 하지 않고 Extend-Ranged EV(EREV) 라고 해서, 구동은 모터만으로 가능하게 하고 작은 가솔린 엔진은 제너레이터 역할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용량뿐 아니라 출력면에서 절대적으로 앞서 있는 리튬계 이차전지가 서서히 안전성의 신뢰성 측면과 성능의 신뢰성 측면을 한단계씩 개선시켜 오면서 새로운 세대의 하이브리드 카인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와의 마리아주가 서서히 완성됐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준중형, 중형으로 대별되는 아반떼급과 소나타급 차량에 채용될 예정으로 있다.
다른 산업에서도 그래 왔듯이, 휴대폰에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대세로 만든 게 한국 휴대폰 업체였던 것처럼 미래형 자동차도 한국 업체의 영향력과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한국의 자동차산업과 이차전지산업의 마리아주는 아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세계 2위권에 진입한 리튬 이차전지산업과 준중형 및 중형에서 특히 강한 한국 자동차산업의 결합은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하이브리드 카를 만들어냈다. 유럽은 자신들이 강한 자동차 기반 기술을 토대로 디젤 하이브리드와 마일드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냈다. 일본은 전자와 이차전지, 자동차 기술을 효과적으로 결합시킨 풀 하이브리드를 만들어냈듯이 한국 자동차산업은 한국이 강점을 갖고 있는 준중형의 아반떼급 자동차의 LPI형 파워트레인과 마일드 하이브리드화시킨 방식을 한국형 하이브리드의 1세대로 제시했다(그림 5).
다른 기사에서도 종종 언급한 바와 같이, 하이브리드화를 통해 고 연료효율(고연비)를 달성하더라도 열역학 제 1법칙인 ‘에너지 보존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LPI는 한국 자동차산업이 강점으로 갖고 있는 기술로 훌륭한 결과를 얻어낼 것으로 생각한다(아는 독자는 알겠지만 자동차 스펙의 큰 틀은 이미 2~3년 전에 결정돼 온 것이니 지금 상황에 너무 맞추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2세대형으로 소나타급에서 풀 하이브리드를 달성하겠다는 전략은 풀 하이브리드 중심으로 가고 있는 일본 자동차산업과 무리한 승부를 하지 않는 적절한 선택으로 보인다.
사실 혼다에서 출시하고 있는 시빅 하이브리드 자체가 마일드 하이브리드에 해당하고, 피트(Fit) 등의 하이브리드 모델에서도 토요타의 프리어스에 뒤지지 않는 연료효율을 내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식을 채용한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주행에서 고 연료효율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실주행에서 유로향 BMW 520d가 프리어스보다 높은 연료효율을 보였다는 이전 기사 내용을 기억하면 좋겠다. 음식에 비유하면, 어떤 재료를 썼냐가 핵심이 아니라 결과적인 맛과 영양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현대/기아 마크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모습이다. 한국형 플러그인 하이브리드가 어떤 모습으로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전 글에서도 밝혔듯이 일본형보다는 미국의 EREV에 가까운 형태가 적합할 것이란 게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특히 제어기술이 단순화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기에 새로운 현대/기아만의 선물이 하나 정도 더 장착돼 한국 고유의 방식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강력한 한국의 중대형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산업을 생각한다면 배터리에 의해 구동되는 전기모터 기반의 파워트레인 비중이 높은 형태로 가는 게 적절치 않나 싶다. 한국의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산업이 미국의 GM쪽 핵심 공급자를 목표로 개발과 양산을 진행하고 있는 것 자체도 향후 한국형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방식이 EREV 유사 형태로 가게 되었을 때 장점이라고 추가하고 싶다. 또 미국에 수출될 것을 감안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에 대한 대응도 다음과 같은 부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우선 미 행정부가 바뀌면서 미국의 운송 인프라스트럭처 자체에 큰 기반이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강력한 자동차산업과 그들 로비스트의 활약으로 미국은 광활한 대륙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주요 운송수단으로 장거리는 비행기, 중거리와 단거리는 자가용이 주요한 역할을 해왔다. 물론 인구밀도로 보자면 한국에 비해 극히 낮은 곳이다 보니 필요치 않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었겠지만, 캘리포니아 주의 남북 횡단 고속철도에 대한 고려, 오바마 행정부 자체의 고속철도 도입에 대한 고려(그림 6) 등을 감안하면 새로운 교통망이 짜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된다면 적어도 자동차의 역할은 단거리 운송수단으로 축소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미국 에너지성의 수장인 스티브 추 장관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철학이 그대로 반영된다면, 화석연료 기반의 자동차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기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글의 주제로 잡은 플러그인 자동차와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 시점이 되었다.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를 한마디로 지능적인 전력 분배와 공급 체계라 규정하고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그림 7). 한국에서도 한때 정책적으로 지능적인 전력 분배와 공급 체계에 이차전지나 초고용량 커패시터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기된 적이 있다. 그 당시는 한국의 기온이 지금과 같은 아열대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고 심야의 유휴 전기를 염가로 공급하던 시절이었다.
시작은 일본에서도 제기된 적 있는 부하 관리(Load leveling), 즉 분산 전원의 개념으로 공급 초과의 전력을 전력망 사이에 중대형 이차전지 시스템을 배치해 저장했다가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심야 전력에 대한 문제제기로서의 부하 관리는 2000년대 초중반 시기의 현실과는 맞지 않았기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즉 1990년대의 전력망과 이차전지의 결합에 있어서는 피크타임의 전력량을 커버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당시 생활환경을 본다면 전력 사용량에 있어서 분명한 피크타임이 시간대별, 월별, 계절별로 나타났기에 가능한 시절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9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Y2K 버그라는 해프닝 아닌 해프닝(전산 담당자나 금융권에서는 심각한 사건이었지만, 일반인들이 체감하긴 어려웠던 사건이다)을 겪으면서 일어난 변화 중 하나를 꼽는다면 ‘모바일(mobile)’이라는 화두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경제계의 거두인 삼성그룹의 이건희 전 회장도 언급했던 부분이다. 그럼 이 모바일이란 화두가 에너지 그리드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필자가 2000년부터 갖고 있던 기저의 생각은 ‘Mobile 2010: from cell phone to vehicle’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생각의 한 단면을 갖고 2000년으로 진입하면서 일어난 변화를 본다면, 이 사회가 1990년대에 비해 전기 에너지에 의존도가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무선전화가 아닌 이동전화가 실생활에 실제적으로 파고든 시기가 1990년대라면 2000년대는 하이브리드 카가 실생활에 실제적으로 정착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후반,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제안은 새로운 ‘전기 먹는 하마’로서 운송수단이 본격적인 진화를 시작할 것이란 점과 함께 자동차까지도 에너지 그리드와 유기적인 결합을 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러그인 하리브리드는 풀 하이브리드와 같은 단독 동작형 하이브리드와는 궤를 달리하게 된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독자들이 친숙한 휴대폰에 비춰 본다면, 집에서 휴대폰 수천 개를 한꺼번에 충전하게 된다는 얘기가 된다. 충전 장소를 단순히 집으로 한정지었지만 실제로 공급되기 시작하면 공공장소에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충전구와 집속할 수 있는 스테이션이 설치될 것이다(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는 초창기 EV1에 사용하던 스테이션의 위치를 알려주는 교통표지판이 남아 있다). 그럼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의 핵심은 전기에너지 공급에 대한 것이 화두가 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소형 모바일 기기는 기존의 에너지 그리드로 충분히 커버 할 수 있지만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는 전혀 다른 시대를 열어갈 단초를 제공하지 않을까 싶다.
먼저 벌어질 상황으로 본다면, 첫째로 많은 사람이 잠든 심야 시간대의 전력 사용량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공급과 더불어 점점 올라가게 될 것이다. 물론 에어컨디셔너 등의 집중 보급으로 예전과 다른 심야전력 사용량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래도 일과시간대의 전력 사용량에 비길 바는 아니다. 하지만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를 갖게 될 가정의 전력 사용 패턴은 현저한 변화를 보일 것이다.
둘째로 순간 전력사용량에 대한 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그림 8).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마니아들(굳이 전도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칭하자면)은 극단적으로 큰 대가가 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하겠지만, 여기에는 미묘한 기술적 배치가 가능한 것이 있다. 바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 시스템의 완충조건에 대한 조절이다. 일례의 수치를 들자면, 사람들의 평균 수면 및 휴식 시간으로부터 추산해 약 8~10시간에 완충되도록 조절하면 되는 것이다. 굳이 급속 충전 기술을 개발해 2시간 내에 충전 완료라는 식으로 진행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주 5) 이는 발전시설의 과도한 확충을 예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즉 ‘overnight charging, daylight driving’ 모델로 유도해가면 현재의 에너지 그리드에도 큰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플러그인 하이브리드가 도입되기 시작할 때,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에서 준비해야 할 것과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충족요건은 어떤 것이 있는지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겠다.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공급에 있어 필요한 것은 발전시설의 확충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드 말단의 획기적인 변화가 수반돼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한 때 유행한 유비쿼터스란 의미가 될 것이다) 스마트 그리드의 말단은 새로운 ‘전기 먹는 하마’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충전 방식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와는 다른 방식이 요구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필자의 단편적인 사유 중 하나를 든다면, 에너지 그리드에 걸리는 부하주 6)에 따른 ‘Variable charging’ 방식이라고나 할까. 이 부분이 기술적으로 받쳐 준다면,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에서 큰 발전시설의 확충 없이 적지적소에 필요한 전력량의 공급이 이루어질 것이다.주 7)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 시스템에서는 휴대폰용 리튬 이차전지와 전혀 다른 충전방식에 대한 고려와 그에 따른 전지 설계가 수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휴대폰용 리튬 이차전지 충전시의 기본 가정은 충전에 사용될 수 있는 전력량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 없이 무한하다는 것이다(PC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의 무한맵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한 전력량을 인출하여 사용하면 되는 것이고, 제약 변수로 작용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게 디자인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 시스템의 충전시에는 충전에 쓰이는 전력량이 시시때때로, 장소에 따라서도 제약될 수 있다는 점을 기본 가정으로 두고 개발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한다.
복잡한 기술적인 내용은 차치하고 하나의 예시 상황으로만 설명한다면, 충전 전류가 전체 충전 사이클 동안에 C/100 - C/1(여기서 C/n은 n hour rate라고 해서 전지를 ‘충전’하는데 쓰이는 시간으로 환산한 충전 속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100 h rate와 1 h rate는 임의의 값임을 미리 밝혀 둔다)까지 Variable한 상황에서 충전이 이뤄지고 이러한 충전 전류의 크기 변화에 의해 리튬이온폴리머 이차전지의 열화 혹은 폭발 등이 일어나지 않는 고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전기 기반 기술이 필요하다. 물론 EREV의 경우 주행중 가솔린을 연료로 하는 제너레이터에 의한 충전시 Variable한 전류값이 인가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가정에서 충전시 그 충전 속도나 방식, 그리고 스케일 측면에서 고려해야 할 변수가 더 많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휴대폰용 리튬 이차전지에서도 가장 최근에 신뢰성 검사 내용으로 추가돼 있는 부분에 대해 보다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충전이 종료된 시점에서 지속적으로 콘센트에 집속되어 있고 자가 방전에 따라 완충 상태를 리뉴얼하는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이 부분은 휴대폰의 경우보다 더 자주, 더 심각하게 감안해야 한다. 왜냐하면 휴대폰의 경우는 매일 사용하기 때문에 충전기에 계속 꼽아두는 경우가 드물다(다만, 여분으로 공급되는 이차전지는 몇 일, 몇 주일이라도 계속 꼽아두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자동차는 대중교통이 잘 보급돼 있는 곳에 거주하는 사람의 경우뿐 아니라 어디에서나 1주일 이상 차를 이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몇 주일 동안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충전구는 충전 상태를 유지해야 하며, 그에 따른 이차전지 시스템의 변화(주로 열화에 가까운)에 대해 보다 진중히 접근하여 연구개발하고 양산 전지에 기술을 집속시켜야 한다.
리튬계 이차전지는 제품으로 시장에 나오는 순간이 위험하기 보다는 대략 6개월 이후의 다양한 사용자들의 사용 패턴에 의한 용량 감소 패턴에 의해 발화냐, 폭발이냐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뭐랄까 일종의 타이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USABC 등에서 제정한 테스트 매뉴얼에 충분히 반영돼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은 더 많은 손질이 필요한 상태로 보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지업체, 연구계에서는 더 기여할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본다. 스마트 에너지 그리드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의 아름다운 마리아주는 이런 식으로 적재적소에 손질만 된다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한국과 미국은 다른 모델을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심할 정도로 마리아주에 대해 강조했다. 최근 들어 자동차산업의 합병, 파산보호 신청 등을 통한 구도재편에 있어서 마리아주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노닛산얼라이언스는 르노삼성의 성공적인 사업진행에 힘입어 GM 새턴 브랜드 인수를 통한 미국 시장 재진출을 노릴 정도로 삼성자동차 인수는 성공적이었다. 현대/기아 차의 마리아주도 성공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실패한 모델로 끝났고 상하이자동차의 쌍용차 인수는 중국 먹튀로 끝날 공산이 커졌다(이 또한 매각한 한국은 실패). 게다가 GM대우는 GM 측면에서는 우량이었고주 8), 한국에서의 시각은 알맹이만 빼먹는 일방적인 상황이라는 왜곡된 마리아주였기 때문에 힘든 결과를 얻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새롭게 피아트를 필두로 한 새로운 자동차 회사, 폭스바겐과 포르쉐 합병의 급반전주 9), BMW의 적자 소식(아이러니하게도 BMW Korea는 2009년 상반기에 초호황을 거두고 있다), 일본 토요타자동차의 연이은 대규모 적자 소식 등은 자동차산업의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나 싶다(자동차산업의 새로운 라운드에 대해서 미래형 자동차산업과 연관시켜 다음 호 정도에 리뷰 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 필자도 이런 회오리 속에서 어떻게 변화가 일어날 지 100% 장담하긴 어렵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자들처럼 막연하게 ‘두고 보자’, ‘아직은 알 수 없지’란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중고등학교 때 과학 교과서에서 배웠던 과학하는 사고방식과는 많이 어긋난 것 같다. 기술자가 보여야 할 겸손은 ‘두고 보자’와 ‘아직은 알 수 없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니냐’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주장과 가설에 대해서는 근거를 갖고 얘기하고, 가설의 검증 단계에서 버릴 것에 대해서는 반례를 제시하는 모습이 아쉬운 시절이다.
필자는 “Back to Basics(기본으로 돌아가자)”라는 마음가짐으로, 그 동안 부족한 글과 견해에 대해서 더욱 반성하고 글을 쓰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처음 글을 쓸 때는 그냥 미래형 자동차용 에너지 저장장치인 리튬 이차전지에 대해 시작했고, 글이 늘어남에 따라 리튬 이차전지와 자동차의 상관관계, 드디어 미래형 자동차와 에너지 그리드까지 다루게 됐다. 필자의 리튬 이차전지-미래형 자동차-스마트 에너지 그리드의 집속에 대한 옅은 시각에 가미된 경제적인 견해가 독자 여러분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며 글을 맺는다.
2009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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